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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여행

하얀 물결로 가득 메운 영남 알프스를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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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하얀 눈꽃이 가을 하늘을 뒤 덮을 때, 영남 알프스에서

최고의 삶 인사를 드립니다. 세차게 불어오는 바람에 억새가 좌우로 흔들린다.

먼 곳에서 바라보면 민둥산처럼 보이지만 가까이 가면 밀가루를 쏟아 부은 것처럼

사람의 눈을 현혹한다. 가을이 더 깊어지기 전에 살포시 내린 하얀 억새밭을 거닐고 싶다.

 

 

 

 

일곱 개의 높은 산들이 꼬리를 물듯 이어지는 영남의 등줄기.

능선마다 펼쳐진 광활한 평원엔 살면서 누구나 한 번쯤 가슴에

사무쳤을 그리운 속삭임이 있다. 이제는 그 이름조차 희미해진 옛 사랑,

그가 바라보는 곳이 곧 하늘이고,

그 사람의 발이 닿는 곳이 땅에 전부였던 시절이 있었다.

한없이 이어질 것 같던 애틋한 그 길 위엔 먹구름처럼 몰려온

고통과 이별의 순간도 있었다.

그리움의 소리를 따라 찾아가는 길, 그 위에서 만난 그대 그림자

억새를 찾아 밀양에서 오르기 시작한 천왕산,

정상에 다가갈수록 어둠 속을 가르는 등산객들의 모습이 하나 둘 눈에 띈다.

산장에서는 새벽 산행의 허기를 달래주는 밤 냄새가 구수하게 피어오른다.

선 본 남자를 따라 처음 이 산에 올랐던 여인은 능선을 뒤덮은 억새의 마음에

빼앗겨 산 사람의 아내가 됐다.

삶에 힘든 고비마다 산을 찾던 남편은 10여 년 전 산장 주인이 됐다.

 

 

 

 

도시에서 아이들 뒷바라지를 하던 아내가 산장에 정착한 것은 3년 전,

부부가 함께 준비하는 아침 밥상은 그들이 함께해 온 시간만큼이나 푸근하다.

그래서 정겹다. 여기 습관이 없어 산장의 아침 식사가 끝나갈 무렵

억새도 여행객을 맞을 채비를 한다.

산장 부부는 오늘도 누군가의 가을 여행에 소중한 추억을 건넸다.

해마다 이맘때 영남 알프스를 찾는 사람들은 능선을 가득 메운

은빛 물결 앞에 가던 길을 멈춘다.

간월산과 신불산이 갈라지는 고갯마루,

신불산으로 향하는 긴 나무 계단을 건너려면 억새들의 수런거림에 마음이 흔들린다.

산으로 향하던 발길은 어느새 억새밭 한가운데 있다.

바람처럼 떠돌던 마음이 누군가를 만나 화사한 들꽃처럼 피어나던 때가 있었다.

추억의 자리엔 미처 주워 담지 못했던 그리움이 남아 있다.

삶의 여정에서 만나는 숱한 인연들 세월 따라 이름도 얼굴도 희미해지겠지만

갈바람 부는 억새 언덕에 포근한 기억들은 언젠가 외로운 삶의 한 귀퉁이를 채워 주리라.

흐르고 머무는 것은 자연의 섭리, 무엇이 남게 될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사랑이란 머무는 순간에 충실한 것, 내 모든 걸 건 후에는 비로소 추억이 되었다.

 

 

 

 

그리하여 다시 만나지 못하는 시간이 계속돼도 그리움의 자리에선

언제나 화사한 들꽃으로 피어나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억새밭을 뒤로 하고 내려가면 산 아래 첫 마을 밀양 얼음골로 들어선다.

그리고 사람의 마을엔 그렇듯이 상처를 보듬어주는 작은 갓길이 하나씩은 있다.

남명리 장터에는 희망을 일구던 사람들의 옛 정이 남아 있다.

마음의 한복판을 차지하진 않아도 서로의 부분을 나누며 비탈진

삶의 한 구석을 채워주던 정, 때로 모든 것을 내주는 사랑보다

소박한 정이 더 단단하고 깊기도 하다.

마을에 대소사가 있을 때만 문을 여는 방앗간, 모처럼 찜통에서 떡 찌는 연기가 한창이다.

방앗간에서 떡을 하는 날엔 마을 사람들 모두가 나눠 먹는다.

두툼하게 썰어진 떡 한 뭉치로 한 해의 수확도 나누고 가을밤에 적적함도 달랜다.

방앗간을 떠나는 경운기 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벌써 제삿집 앞마당에

모여 이야기꽃을 피울 저녁을 기다린다.

순탄치 않았던 인생길, 서로를 위해 웃어주고 지켜봐 주는 넉넉한

마음들이 있었기에 세월이 가고 시름도 잦아들었다.

 

 

 

 

억새, 사냥의 마지막 여정, 포구.

밀양강과 낙동강이 만나는 삼랑진은 예부터 밀양과 김해 마산 등을 잇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제 낙동 철교는 새 다리와 고속도로에 밀려났다.

이름도 삼랑진교로 바꾸고 철교 대신 인도교로 사용된다.

세월에 밀린 것은 다리만이 아니다. 수백 척의 나룻배와 사람들로 북적이던

포구도 추억으로만 남고 흔적도 희미하다.

과거를 추억하고 젊은 강을 감상하기엔 아직 부부에게 놓인 삶의 무게가 힘겹다.

자식을 위해 앞만 보고 열심히 살아온 부부에게도 가끔은 쓸쓸한 바람 소리가 난다.

숱한 강바람을 맞으면서 함께 나눌 수 없을 것 같던 부부의 외로움도 한데 섞이고 옅어졌다.

정은 강의 갈대숲을 동경했던 처녀와 그녀를 사랑했던 청년,

남은 생애 동안 그들은 또 어떤 추억들을 저 강물 위로 띄워 보낼까.

 

 

 

 

언젠가 한없이 외롭고 쓸쓸한 날,

강물에 띄운 그리움이 그들의 야윈 어깨를 살며시 다독여 줄 것이다.

숨을 헐떡거리며 영안 알프스에 올랐을 때, 눈앞에 하얀 억새가 고생했다고

쌍수를 들어 환영했던 것, 그것이 바로 정직함의 보상이 아닐까요.

인생의 과정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우리가 여행을 가 듯, 산을 오를 때,

땀을 흘린 후에 기쁨과 성취감이 있는 것처럼 산을 내려올 때,

좋은 추억으로 스치는 바람과 함께 여유 있게 내려 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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