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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여행

추억과 시간이 머무는 길목, 전남 장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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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고의 삶 인사를 드립니다.

날씨가 추워지면 자동적으로 여행은 남쪽으로 향하는 것 같다.

늦가을의 햇빛은 구름 사이로 부끄럽게 내밀고 시간의 짧음을 재촉하며,

서산으로 달려가고 있다. 장흥의 산과 바다는 새 옷을 갈아입기 위해서

거친 파도와 뒹구는 낙엽들이 여기저기에 두꺼운 옷으로 몸을 치장하고 있는 것이다.

떠나고자 하는 사람은 결코 제지하지 말고 떠나게 하라.

오늘도 장흥으로 떠나는 마음은 설렘으로 가득하다.

 

 

 

 

그런 말이 있다. 문뜩 혼자라는 생각에 눈시울이 붉어지는 날,

그런 날이면 시간의 숲을 뒤적여 곱게 간직해 둔 추억 한 자락을 꺼내 든다.

심난하고 어지럽던 상념들이 반짝이는 기억 앞에서 슬며시 뒷걸음질을 친다.

괜찮다. 괜찮다. 담고 싶은 추억 하나 가졌으면 그걸로 됐다.

사는 게 종처럼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그런 날이면,

내 인생 가장 아름다운 시절 그 기억 위를 걷는다.

적당한 거리를 두고 서로를 돌보는 할머니와 나무,

얼마나 오랜 세월을 마주하고 살았기에 저 둘은 앉은 모습마저 닮은 걸까.

손길 닿던 살림들이 그리워 자식들의 만류도 뒤로 하고 고향 살이를 고집했다.

이어지는 두드림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팥알이 아니라 지난 세월을 돌아보는 지혜와 여유다.

팥알 위로 수북이 쌓인 그리운 시절이 손끝을 타고 눈앞에 펼쳐진다.

 

 

 

 

알알이 채운 추억들로 오늘 하루도 붉게 영글어 간다.

오랜만에 대장간에 따뜻한 생명의 기운이 퍼진다.

구석구석 깊은 상처까지도 매만지는 노련한 손놀림,

오랜만에 대장간을 찾은 반가운 일거리에 망치질도 가볍다.

골골 앓던 녀석이 금세 숨을 쉰다.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 가는 이름.

오십 년을 대장장이로 살았다. 남들은 세월의 흐름을 좇지 못한다고 나무랐지만,

청춘을 다해 생명을 나눈 벗들과 남은 여생을 함께 한다는 게

얼마나 근사한 일인지 그네들은 알까.

 

 

 

 

늦가을 야무지게 익은 감을 보며 채 익지도 않은 채 객지로 나간 자식들 얼굴이 아른거린다.

한 아름이고 간 꿈은 별 탈 없이 잘 여물고 있을까.

낮은 돌담 위로 느린 오후의 햇살이 소리 없이 내려앉았다.

나는 지금 시간의 길목을 서성인다. 오래전 기억에서 놓쳐버린 아득한 시절로 걷다 보면

아주 행복했던 그 시절과 마주치지 않을까.

 

 

 

 

그 바다에 서면 먼 기억 속 그리운 이들의 얼굴이 하나 둘 물 위에서 반짝인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인연들이 무심히 지나쳤던가.

미안함과 그리움이 수면 위로 솟아오른다.

저 바다에 그리운 마음 한편 띄워 보내면 긴 바람결에 고마운 인연

흘러드는 날도 있으리라. 갯가에 묶인 마음이 인연만 기다리고 있다.

이야깃거리 많은 장흥에서도 천 년에 걸쳐 전해지는 슬픈 전설이 있는 곳, 아사지.

동생에게 꿈을 잘못 팔아 왕비가 되지 못한 여인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연못으로 몸을 던졌다. 빛바랜 사진 속 풍경처럼 정지된 시간들이 머무는 곳,

머리칼을 들추니, 하얗게 샌 세월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다른 이의 시간을 다듬느라 내 세월이 흐른 줄은 까맣게 잊고 살았다.

 

 

 

 

열 마디 말보다 주고받는 눈빛이 더 정확해지기까지 사십 년의 시간이 흘렀다.

분주했던 날들을 꼼꼼히 기억하고 있는 이발소의 터줏대감들 이발사보다

더 자주 문 밖을 내다보며 손님을 기다린다.

이 머리카락에는 어떤 기억들이 숨겨 있을까?

누군가는 붙들고 싶었을 세월임을 알기에 빚을 하나에도 마음이 쓰인다.

수목 사이로 비치는 정자에 기대어 탐진강 물결 위에 몸을 누이면,

물 위에 뛰어 놓은 옛 문인들의 시심에 온 마음이 붉게 물든다.

짙게 번지는 문학의 향내를 쫓아 발길을 재촉한다.

 

 

 

 

한 시대를 치열하게 살다 간 소설가 이청준,

그의 숨결이 머물던 곳에 앉아 옛 시절 어린 이청준이 보았을 세상을 그려본다.

떠나고 나서야 그의 자리가 컸음을 깨닫는다.

소년은 창 너머 세상을 어떻게 꿈꿨을까?

이청준은 문학을 꿈꿨던 이곳을 떠난 이후 찾지 않았다.

어려워진 살림에 집까지 내줘야 했던 어머니의 슬픈 뒷모습이

지워지지 않았기 때문이었으리라.

회진 포는 이청준의 작품 속처럼 소박한 사람 내음으로 가득한 곳이다.

삶은 고단해도 그 가슴속 바다는 늘 내일에 대한 부푼 꿈으로 가득하리라.

한때 제법 큰 포구였던 이곳의 시간은 이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만 흘러간다.

회진 앞바다에 드리워진 저 넘어 관음봉 그림자,

어린 이청준에게는 비상하는 한 마리 학이었다.

그 기억으로 탄생한 선학동 나그네는 임권택 감독에게 백 번째 영화 천년 학을 선물했다.

 

 

미처 정박할 새도 없이 얼마나 많은 기억들이 망각의 바다로 걸음을 재촉했을까.

나는 이미 과거가 된 시간 위를 다시 걷는다.

간절히 붙들어 놓은 시간만이 추억이 될 것이기에 저물어가는 태양 속에

서운하고 불미했던 것은 태워버리고, 새로운 새싹의 마음으로 다시 떠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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