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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여행

100년의 항구, 군산에 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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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고의 삶 인사를 드려요.

어떤 지역을 간다고 하면 그 지역이 어디에 있는지, 무엇이 유명한지를

먼저 체크를 하고 떠나게 되는데요. 출발하는 이곳은 100년의 역사의 항구로

설움과 고통, 아픔의 역사를 고스란히 안고, 그렇지만 밝은 미래를 위해

넓은 마음으로 품어주는 곳, 나의 삶에 조명하여 여행할 수 있는 곳,

100년의 항구, 군산에 가고자 합니다.

 

 

 

 

나쁜 기억들도. 시간이 지나면 그 색이 발해진다.

군산항. 백 년 전 이 항구에서 떠나보냈던 수백 척의 미곡 선들,

늙은 노모와 어린 자식들을 위한 목숨처럼 소중했던 쌀을 보내던 아픈 기억들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그 옛이야기들을 군산은 버리지 않는다.

그 아픔조차 역사였고, 내 아버지의 삶이었고, 오늘의 나를 키운 토양이다.

군산 내항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군산 장항 간을 오가는

사람들과 만선으로 입항하는 배들로 북적이는 모습은 이제 옛이야기가 돼버렸다.

예전에 번성했던 항구의 모습은 찾기 힘들다. 100년의 항구, 군산에 가다.

 

 

 

 

군산 경암동 기차 길 옆 동네에도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마치 오래된 화보집을 들춰보듯 낯선 풍광이다.

기차 길과 담벼락 사이가 십오 센티미터 정도 이런 집들이 있었을까 싶은데.

이곳에 사람이 모여 산 것이 벌써 수십 년도 더 된 일이라 한다.

가난이 부끄럽지 않고 보람이 되는 건 희망이 있기 때문이다.

설움과 무력의 횡포가 교훈이 되고 각오가 되는 건 자존심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일제 강점의 긴 터널을 지나자 한국전쟁이라는 먹구름이 드리웠다.

역사의 질곡에 유독 상처도 많은 땅이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부지런했다.

기차와 집이 나란히 서 있는 이 골목이 아직도 남아 있는 건 가난해서가 아니다.

이대로의 삶도 충분히 아름답기 때문이다.

 

 

 

 

아주 오래전 군산이란 이름은 바다와 섬을 가리켰다.

육지와 맞닿은 포구가 군산이 돼 버린 지금,

사람들은 이 일대 열여섯 개의 유인도와 마흔일곱 개의 무인도를

모두 아울러 옛날 군산, 고군산이라 부른다.

하늘과 바다와 섬이 보여줄 수 있는 황홀경의 극치다.

시시각각 옷을 바꾸고 있는 이 바다 앞에서 때 아닌 호사를 누린다.

고군산 군도에 맏형 노릇을 하는 섬, 선유도로 가는 길에 군산에서 나고

자란 고은 시인의 시가 떠오른다.

“세노야 세노야, 산과 바다에 우리가 살고 산과 바다에 우리가 가네.

기쁜 일이면 저산에 주고, 슬픈 일이면 내가 받네. “

 

 

 

 

선유도에서 다리 하나를 건너자 무녀도 염전이 나타난다.

지금도 수차를 이용해 바닷물을 끌어올리는 염전 양수기보다

시간도 오래 걸리고 힘도 들지만 수차를 돌리는 얼굴엔 여유가 넘친다.

 

 

 

 

이른 아침에 무슨 바쁜 일이 있는 걸까? 곧바로 엽전 아침 시장을 열렸다.

며칠 비가 오는 바람에 신선한 야채가 부족했던 탓일까.

좋은 물건을 서로 사려고 쟁탈전이 벌어진다.

부추 장사 할머니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시간이 갈수록 야채는 줄어들고,

돈 주머니는 두둑해진다.

 

 

 

 

군산과 대아의 중간 지점쯤에 나무 우거진 작은 숲과 같은 곳에

자리 잡은 집 한 채. 기가 막히게 좋은 땅에 서 있는 집은 이영춘 가옥이다.

1920년경 일본인 대지주 구마모토가 지은 별장 주택으로 프랑스인이 설계하고,

일본인이 시공을 맡고 중국인이 온돌을 놓았다고 전해지는데요.

한마디로 당대 최고의 고급 주택이다.

집 내부 역시 서양식과 일본식 그리고 한식이 교묘하게 절충을 이루고 있다.

최근 일본인들이 이 집을 꼼꼼히 측량한 뒤 일본에 그대로 지어 놓았을 만큼

이 집은 역사적으로나 건축학적으로나 점수가 높다고 한다.

전쟁과 격변의 칠십 년을 지나는 동안 이 집이 완벽하게 처음 제 모습을 보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집주인 이영춘 박사와 그 가족들의 공이 컸다.

지금도 이 집엔 이영춘 박사의 자식들이 살고 있다.

 

 

 

 

무려 백 년의 역사를 간직한 군산의 한 극장,

전라북도 최초의 영화관인 이 극장엔 오늘도 필름이 돌고 있다.

1920년 희소관이란 이름으로 처음 영사기가 돌았을 때,

극장 앞은 연일 장사진을 이뤘고, 수많은 관객들이 울고 웃으며 사랑하던 곳이다.

영화 역시 일제의 검열로 조각나기일 수였지만 관객들은 달려와 관람하고 박수를 쳐주곤 했다.

영화는 분노와 슬픔과 아픔을 공유하고 쏟아낼 수 있는 공공의 장소였다.

수탈이 심했던 군산에 오래된 영화관이 존재할 수 있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쩌면 지금도 매일매일 한 편의 영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각본도 주연도 감독도, 한 사람의 인생의 영화, 언제쯤이면 클라이맥스를 만나게 될까.

얼마나 더 찍으면 예술성도 재미도 있는 영화가 될까.

 

 

 

 

지금 달릴 힘이 없다면 무엇을 위해 뛰어야 하는지,

이정표를 잃어버렸다면, 과거가 살아 있는 군산을 기억한다.

미어질 듯 가슴 아팠던 기억, 차마 말 못 하고 돌아서야 했던 그 어느 날,

그 멈춰진 시간 속에 고여 있던 모든 이야기들을 훌훌 털어 보낸다.

 

 

 

 

그리고 설움과 상처가 많았던 군산이 새로 거듭난 모습을 보면서,

조금은 성숙해 있을 내일의 나를 기대한다.

수년 뒤에 찾아올 희망 또한 나의 몫임을 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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