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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 여행

보성강에 봄을 안고 달려오는 전남 곡성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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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최고의 삶(The Best Life) 인사를 드립니다.

이제는 여행의 기차가 한가롭게 여행객들의 눈을 감동시키는 철로길로 변했다.

그러나 그 철길은 아픔과 기쁨과 즐거움이 교차하며, 철로에 새겼던 역사가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곳이다. 영화 곡성 촬영지가 있어서 많은 분들이 관람을 하고도

있고, 행글라이더도 탈 수 있는 곳도 있어서 겨울에서 봄으로 들어가는 바람을

맞으며 곡성을 즐길 수가 있다. 잊혀가는 곡성을 보며 옛 추억이 새록새록 회상이 된다.

 

 

 

 

아침 날을 깨운 건 분주하게 준비하는 이월 말의 태양이었다.

봄이야라고 속삭이는 달력 속 연분홍빛 숫자들을 바라보다가 기차를 탔다.

기차는 산골을 에둘러 강으로 향한다. 규칙적인 바퀴 소리는 이 길을 여러 번 오간 듯한

느낌을 준다. 편안해졌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같은 강물에게 겨우내 웅크린 마음

한 자리 넉넉히 적선해 달라고 부탁해 볼까? 열차는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길목에 서 있었다.

골짜기가 많은 곡성에 기차역이 들어선 것은 1933년,

나라를 잃은 설움과 고단함을 실어 나르던 옛 곡성역은 빼앗긴 봄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기적 소리가 울리면 사람들은 바쁘게 대합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열차는 60여 년간 남도 땅을 가로질렀다. 그러나 1998년 전라선의 노선이

바뀌면서 옛 곡성역을 비롯한 일부 구간이 폐쇄됐다. 나이 든 열차들도 옛 역과 함께

멈춰 섰다. 석탄 연기로 얼굴이 까맣게 된 승객도 고갯길을 오를 때마다 힘겨워하던

느린 기차도 옛이야기가 됐다.

 

 

 

 

가버린 세월을 대신하는 건 새로운 봄이다.

개선된 구간에 다시 열차가 다니기 시작하면서 기적 소리도 돌아왔다.

옛 곡성역과 가정역 사이 13킬로미터를 오가는 단선 열차지만 물굽이를 돌아드는 차창 밖의 풍경들은 이른 봄과 은밀하게 내통하기엔 부족함이 없다.

그곳에서 만난 노부부에게 기차는 특별한 공간이다. 학교를 갓 졸업한 앳된 처녀와

젊은 장교가 만나 사랑에 빠진 것이 벌써 사십여 년 전이다.

왜 기적 소리는 항상 추억과 함께 오는 것일까? 기차 여행 내내 보성강은 나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날이 풀려 얼음이 녹았다. 갯버들은 맨 먼저 강변에 피어났다.

송 털 난 모습이 예뻤다. 보성강은 봄을 불러들였다. 이 풍경에 감히 내 설렘을 견디기가

버거웠다. 섬진강과 만나기 전까지 보성강은 내륙 깊은 곳을 휘감아 흐른다.

 

 

 

 

산마을도 성큼 다가온 봄맞이로 분주하다

본격적인 농사철을 앞두고 할머니는 가시오갈피를 베러 나왔다.

본초강목에서는 한 줌의 오가피가 한 마차의 교목보다 낫다고 했다.

할머니에게도 이 나무는 버릴 것이 없다. 가시밭길 같던 세월도 저 부지런한 발밑에서

다져지고 또 다져졌으리라. 척척 쌓아 올린 돌들은 이웃끼리 더불어 사는 모습을 닮았다.

영원히 돌려받지 못하는 내리사랑이지만 부모에게 자식만큼 환한 봄이 또 있을까?

어머니의 고단했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새벽의 산사에서 날을 맞아준 건 뜻하지 못한 비였다.

아직 산과 강이 침묵하는 시간 경내에 들어 호젓하게 빗소리를 듣고 있자니 한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빛나는 외로움" 빛나는 외로움이라 혼자여도 쓸쓸하지 않은 봄날의 서정이

오롯이 나를 감싸고 있었다. 봄비가 내린 후 들녘엔 초록이 깊어졌다.

눈보다 더 호사하는 건 후각이다. 흙은 흙대로 푸른 풀대로 짙은 살 냄새를 풍기며

다가선다. 향기에 취한 춘심은 벌써 밭에 나가 있다.

오늘처럼 마음이 풀어헤쳐지는 날엔 식구가 없어도 한정 없이 냉이를 캔다.

저절로 인심이 후해지는 이유에서다. 촉촉한 대지는 온통 생명들의 합창으로 활기차다.

생명을 잉태하고 낳아 기른 손이 들뜬 봄의 속살을 어루만진다.

 

 

 

 

새 봄엔 나도 구석진 마음 한 자리에 고운 꽃 한 송이 피워낼 수 있을까?

포근했던 기억들을 안고 기차는 다시 옛 곡성역으로 돌아온다.

두터운 외투 차림으로 열차에서 내리니 시납으로 물들었던 푸른 보물들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지금도 보성강 옆 깊은 계곡 어딘가에선 투명한 봄이 여물어가고

있으리라. 그리고 나도 이제 돌아가야겠다. 한가운 누군가를 만나 활짝 웃고 싶다.

보성강에서 만난 봄은 눈부셨다. 내리는 눈으로 하얗게 변했던 대지가 봄기운을

안고 봄기운을 뿜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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